•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병보다 기다림의 고통”…전직 광부들의 산재승인은 천당과 지옥?

등록 2025.05.14 07:00:00수정 2025.05.14 07:20:23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18개월의 기다림, 그러나 승인과 동시 종결처분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탄광 지하 막장에서 채탄작업을 하고 있는 광부의 모습.(사진=전제훈 작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탄광 지하 막장에서 채탄작업을 하고 있는 광부의 모습.(사진=전제훈 작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태백=뉴시스]홍춘봉 기자 =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

매일 아침, 강원 태백과 도계지역 병의원 앞에는 이른 시간부터 줄을 서는 이들이 넘쳐난다.

이들은 단순한 통증 치료를 받기 위해 모인 게 아니다.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의 특진을 앞두거나 산재 승인을 앞둔 상태로 치료비를 자비로 부담하는 ‘예비 산재환자’, 즉 아직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환자’들이다.

이들의 수는 이미 500명을 훌쩍 넘겼고, 산재요양 신청 후 승인까지 1년 6개월 이상 소요되는 현실 속에서 이들은 몸뿐 아니라 삶의 체력까지 점점 갉아 먹히고 있다.

태백, 정선, 도계 등 폐광지역에서 근무한 광산 노동자들이 주로 신청하는 산재는 근골격계 질환, COPD(폐쇄성 폐질환), 소음성 난청 등이다. 이들 질환은 시간이 생명이며, 조기 치료가 회복을 좌우한다.

그러나 현실은 ‘60일 내 심사 완료’라는 산재심사 기준은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폐광촌에서는 이러한 원칙과 기준이 무너진 지 오래다.

공단 태백지사의 산재승인 평균 소요 기간은 18개월이 넘는다. 심하면 3년 넘는 사례도 있다. 산재보험은 이들에게 보호막이 아닌 고통의 행정 절차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태백과 도계의 병의원 물리치료실에는 아침부터 줄이 이어진다. 승인 전 치료비는 전액 자비로 부담된다. 대학병원의 MRI 촬영에 최소 수백만원, 최고 500만원에 주 3회의 물리치료까지 감당하다 보면, 돈 나올 데 없는 폐광 노동자들은 치료비 부담이 만만치 않다.

더 큰 문제는 “공단 질병판정위원회의 승인 여부에 따라 환자들의 생사여탈권이 달려있다”는 환자들의 하소연은 폐광촌의 현실을 대변한다.

환자가 대학병원에서 MRI 촬영을 해도 공단은 산하 병원(태백, 동해 등)에서 다시 특진(정밀 검진)을 요구한다. 이후 검진결과를 토대로 질병판정위원회에서 심사를 받는다. 그 모든 과정에서 노동자는 돈과 시간을 잃는다. 병은 그대로다.

신청은 단순하지만 승인은 까다롭고 중간 절차고 복잡하기에 대부분 노무사나 법률 대행인을 통해서 산재요양 신청을 하게 된다. 산재보험 제도가 ‘약자 편’이 아닌 ‘서류 싸움’의 장이 되면서, 환자들은 한 없이 힘들어 지고 고통을 수반한다.

특히 공단 태백지사의 문제는 인력 부족과 함께 다른 곳과 다른 복합적인 문제가 뒤죽박죽이다. 매년 반복되는 정기 인사 교체로 숙련도가 낮은 직원들이 투입되면서, 신청서가 서랍 속에 묻혀버리는 일도 빈번하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2023년에 신청한 일부 요양서류가 2025년 5월 현재까지도 미처리된 채 남아 있는 경우도 발생한다.

황상덕 진폐협회 회장은 “공단 태백지사는 업무가 많고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져 직원들이 가장 기피하는 지사가 되었다”며 “신규 직원은 업무숙련도가 높아지기까지 수개월이 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 몫”이라고 말했다.

또한 “태백지사 직원들은 업무가 과중하지만 승진과 벽지 수당 등의 인센티브가 전혀 없는 실정”이라며 “태백지사 직원들의 고충을 이해하지만 산재업무 처리과정을 보면 공단의 존재 이유에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근로복지공단 태백병원 입구에 설치된 조형물.(사진=뉴시스) *재판매 및 DB 금지

근로복지공단 태백병원 입구에 설치된 조형물.(사진=뉴시스) *재판매 및 DB 금지



현재 공단 태백지사 보상부 직원은 28명. 직원 1명 평균 근골격계 100건 안팎을, 다른  직원들은 난청·COPD 100건 이상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공단 본부에서 인력 2명을 충원 받았지만, 현장에선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반응뿐이다. 업무 효율화도, 전산 시스템 개선도 없다.

근로복지공단은 “과다 신청과 병원 특진 절차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정작 태백은 전국에서 MRI CD와 소음성 난청, COPD를 가장 많이 제출하는 지역이다. 즉, 이곳 환자들은 누구보다 ‘입증’에 협조적이지만, 시스템은 그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공단 태백지사 관계자는 “일부 환자의 경우 50곳이 넘는 부위에 대해 산재요양 신청을 하기도 한다”며 “산재대행 변호사와 노무사 및 진폐환자 단체와 간담회를 통해 아픈 부위만 산재신청할 것을 요청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무사 A씨는 “환자 1인 최대 신청은 14곳이 전부라 50곳 신청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며 “근로복지공단은 산재승인 심사절차 단축 등 효율적인 제도개선이 시급하며 탄광촌 환자들의 특성을 잘 헤아려 주지 못해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남해득 폐광근로자협의회장은 “산재승인에 1년 6개월 이상을 기다리는 상황에 최근 승인과 동시에 종결을 시키는 강원지역본부의 행태에 분노가 치민다"며 "공단은 산재환자의 언덕이 아니라 장애물이라는 비난이 나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산재보험은 노동자가 다쳤을 때 가장 먼저 손 내밀어야 할 사회안전망이다. 그러나 지금 태백에서 산재는 ‘산재요양보험은 신청부터 경쟁’, ‘언제 승인여부가 결정될지 애간장의 연속’이라는 원망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casinohong@newsis.com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