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스파이 공장'으로 삼은 브라질…신분 위장후 전세계 파견
브라질 당국, 3년 수사로 러시아 스파이 9명 적발
비자 면제 많은 여권 사용해 해외 공작 활동
우크라 침공 뒤 전 세계 러 공작 적극 대응
![[서울=뉴시스]브라질 당국이 인터폴 수배 대상으로 올린 러시아 위장스파이들. (출처=뉴욕타임스에서 재인용) 2025.5.22.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age.newsis.com/2025/05/22/NISI20250522_0001848801_web.jpg?rnd=20250522083742)
[서울=뉴시스]브라질 당국이 인터폴 수배 대상으로 올린 러시아 위장스파이들. (출처=뉴욕타임스에서 재인용) 2025.5.22.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러시아가 브라질에 최소 9명의 정보 요원을 파견해 몇 년에 걸쳐 신분을 완벽하게 위장하는 공작을 벌인 사실이 브라질 당국의 3년에 걸친 수사로 밝혀졌다고 미 뉴욕타임스(NYT)가 21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러시아는 브라질을 심층 위장 공작원 공장으로 삼았다. 비자 면제 대상국이 미국 못지않게 많은 브라질 여권을 획득하게 한 뒤 다른 나라에서 비밀공작 활동하는 스파이로 삼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브라질에서 연애를 하고, 보석 사업을 벌이고, 모델로 활동하고, 미국 대학에 입학하고, 노르웨이에 연구자로 취업하고, 부부로 위장해 포르투갈로 진출해 활동했다.
그중 한 명인 아르템 슈미레프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3D 프린팅 사업을 운영하면서 브라질인 여자 친구, 고양이와 함께 고급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는 ‘게르하르트 다니엘 캄푸스 비치히’라는 이름으로 브라질 출생증명서와 여권을 가진 시민으로 살고 있었다. 6년 동안 잠복생활을 하던 그를 브라질 수사관들이 찾아냈다. 단서는 1986년에 출생한 것으로 돼 있는 그가 실제로는 2015년에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것처럼 보인 점이었다.
슈미레프는 위장 신분을 정교하게 구축해 여자 친구와 직장 동료들조차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약간의 외국인 억양이 섞인 발음으로 포르투갈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외국인 억양에 대해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어린 시절 보낸 때문”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그는 직접 설립한 3D 프린팅 회사 운영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리우 중심가 고층 건물 16층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일했다. 그 건물은 미국 영사관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직원들을 먼저 퇴근시키고 혼자 일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의 행동에 이상한 점도 있었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항상 인터넷 연결을 끊어뒀고 사진 찍히는 것을 몹시 싫어했으며 사업 규모에 비해 훨씬 많은 자금을 썼다.
갑자기 유럽과 아시아로 출장을 떠나면서 경쟁 업체들을 상대로 “산업 스파이 활동을 한다”고 농담하곤 했다.
그의 아내 이리나 슈미레바 역시 러시아 정보요원이었고, 지구 반대편 그리스에서 그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3년 “동방작전”으로 9명 적발
브라질 방첩 요원들이 찾아낸 러시아 스파이는 모두 9명으로 이중 6명은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인물들이다.
브라질의 수사에는 최소 8개국이 동참했고 미국, 이스라엘, 네덜란드, 우루과이 및 기타 서방 안보 당국이 정보를 제공했다.
러시아는 10여 년 동안 전 세계 곳곳에서 파괴 공작을 벌였다. 2014년 암스테르담을 출발한 여객기를 격추했고, 미국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의 선거에 개입했으며 적으로 간주된 인물을 독살하고, 쿠데타를 모의했다. 그러나 각국의 러시아 스파이 대응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우크라 침공 뒤 전 세계 러 공작 적극 대응
브라질의 수사는 고로로 훈련된 요원 여러 명을 제거하면서 러시아의 불법공작원 프로그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최소 2명이 체포됐고 나머지는 급히 러시아로 도피했다. 신분이 드러난 이들은 앞으로 해외에서 다시는 활동하기 힘들 전망이다.
브라질 수사요원들은 이른바 ‘동방작전(Operation East)을 펴면서 몇 년 동안 수백만 건에 달하는 브라질 신원 기록을 샅샅이 뒤져 특정 패턴을 추적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2개월이 채 안된 2022년 4월초 미 중앙정보국(CIA)이 브라질 연방경찰에 긴박한 메시지를 전했다.
러시아군 정보기관(GRU) 소속 비밀 요원이 네덜란드 국제형사재판소(ICC) 인턴 십에 참가하려 한다고 통보했다. ICC가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조사하기 시작한 때였다.
ICC 인턴 십에 지원한 사람은 ‘빅터 뮐러 페레이라’라는 이름의 브라질 여권을 사용했으며 미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대학원 학위까지 받은 상태였다.
CIA는 그의 본명이 세르게이 체르카소프라고 알리면서 네덜란드 당국이 그의 입국을 거부해 상파울루행 비행기에 타고 있다고 브라질에 알렸다.
브라질 경찰은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즉각 체포하지 않고 며칠 동안 감시한 끝에 문서 위조 혐의로 체포했다.
출생증명서 위조 적발하면서 수사 본격화
경찰이 체르카소프의 출생증명서를 찾아내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러시아 스파이들은 사망한 사람들, 특히 영아들의 신분을 도용해 신분증을 획득하곤 했지만 체르카소프는 달랐다. ‘빅터 뮐러 페레이라’라는 사람이 존재한 적이 없는데도 출생증명서를 갖고 있었다.
출생증명서에 빅터 뮐러 페레이라가 1989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라질 국적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고 돼 있었다. 그 여성은 실제 존재했으며 1993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경찰은 여성의 가족을 찾아 아이를 낳은 적이 없음을 확인했다. 출생증명서에 ‘아버지’로 기재된 사람도 허구 인물이었다.
체르카소프의 신분 위장이 밝혀지면서 러시아 스파이가 여러 명일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서울=뉴시스]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의 연방경찰청사. 브라질 요원들이 이곳에서 3년에 걸친 수사를 통해 러시아 위장 스파이 9명을 적발해냈다. (출처=위키피디아) 2025.5.22.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age.newsis.com/2025/05/22/NISI20250522_0001848798_web.jpg?rnd=20250522083554)
[서울=뉴시스]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의 연방경찰청사. 브라질 요원들이 이곳에서 3년에 걸친 수사를 통해 러시아 위장 스파이 9명을 적발해냈다. (출처=위키피디아) 2025.5.22. *재판매 및 DB 금지
수사관들이 수백만 건의 출생기록, 여권, 운전면허증, 사회보장번호 등을 조사했다. 정부의 여러 행정 데이터베이스가 연결돼 있지 않아 검색이 어려워 상당 부분 수작업으로 진행했다.
이 ‘동방 작전’이 러시아의 스파이 공장 작전 전체를 해체하는 결정적 열쇠가 됐다.
수 세대 동안, 비밀 첩보원들은 가짜 여권과 도용한 이름, 그리고 철저히 연습된 위장 신분 이야기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온라인 기록을 갖고 있는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위장이 힘들어졌다.
신분 위장 요원 활용 고수하는 러시아
푸틴은 2017년 한 TV 인터뷰에서 자신의 과거 삶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떠나고, 조국을 떠난 채로 삶을 조국에 바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위장 스파이들을 칭찬하기도 했다.
브라질은 위장 스파이를 만드는 이상적 장소였다.
브라질 여권은 미국 여권 못지않게 많은 나라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또 다인종 사회여서 유럽계 외모에 약간의 억양이 있는 사람이라도 주목을 끌지 않는다.
특히 시골 지역 출생자의 경우 병원이나 의사의 확인을 요구하는 대신 2명의 증인이 부모 중 1명 이상이 브라질인이라고 진술하면 출생증명서를 발급해준다.
또 행정 시스템이 분산된 탓에 지역적으로 부패가 만연해있다.
스파이가 출생증명서에 이어 유권자 등록, 병역서류, 여권 신청을 거치면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전 세계 정보기관들이 협력해 러시아의 첩보 활동을 방해하는데 집중하면서 러시아 스파이들이 적발되기 시작했다.
앞의 ICC 인턴 신분 체르카소프가 가장 먼저 체포됐고 브라질에서 수사선상에 올라 있던 미하일 미쿠신이 노르웨이에 나타나 체포됐다. 슬로베니아에서도 아르헨티나 국적을 위장한 러시아 심층 공작원 2명이 체포됐다.
신원 인터폴 등재로 활동 불가능
브라질을 벗어난 러시아 스파이는 슈미레프만이 아니었다.
마누엘 프란시스코 스타인브루크 페레이라와 아드리아나 카롤리나 코스타 실바 페레이라라는 이름의 30대 부부도 2018년에 포르투갈로 떠난 뒤 자취를 감췄다.
우루과이에도 여러 명의 위장 스파이가 있었다. ‘마리아 루이사 도밍게스 카르도소’라는 이름의 여성은 브라질 출생증명서를 가지고 우루과이 여권을 취득했다.
‘페데리코 루이스 곤살레스 로드리게스’와 그의 아내 ‘마리아 이사벨 모레스코 가르시아’라는 이름의 부부도 있었는데 아내는 금발의 모델로 위장한 스파이였다.
‘에릭 로페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보석상도 있었다. 본명이 알렉산드르 우테킨인 러시아 스파이였다. 그러나 경찰이 그의 보석상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것이 사라진 뒤였다.
이 사건을 잘 아는 서방 보안 당국자에 따르면, 우테킨은 브라질을 떠난 뒤 중동 지역에 잠시 머물렀고 그와 다른 요원들이 현재는 러시아로 돌아간 것으로 보고 있다.
브라질의 ‘동방 작전’이 많은 스파이를 찾아냈지만 기소된 사람은 문서 위조 혐의로 체포한 체르카소프 뿐이었다.
그러나 브라질은 파악한 정보를 전 세계 정보기관들과 공유하면서 각국이 러시아 정보요원 데이터와 대조해 스파이임을 밝혀냈다.
‘페레이라’라는 이름으로 포르투갈에서 살던 부부는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다닐로프와 예카테리나 레오니도브나 다닐로바임을 확인하는 등이었다.
브라질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에도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가 브라질에서 대규모 첩보 작전을 벌인 것에 배신감을 느꼈고 러시아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길 원했다.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러시아 스파이 신원을 공개한 이유다.
지난해 가을, 브라질 당국이 인터폴에 슈미레프와 체르카소프 등 러시아 스파이들의 이름, 사진, 지문을 올리면서 이들의 신원이 196개 회원국에 전파됐다.
우루과이도 브라질 신분으로 체류하던 로만 올레고비치 코발, 이리나 알렉세예브나 안토노바, 올가 이고레브나 튜테레바 등 러시아 스파이 혐의자들의 신원을 인터폴에 올렸다.
이로써 이들이 외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다시 수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 모든 스파이들 가운데 체르카소프만이 유일하게 수감 중이다. 그는 문서 위조 혐의로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5년으로 감형됐다.
러시아 정부는 그를 조기 귀국시키기 위해 마약 사범이라고 주장하며 송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브라질이 “마약 밀매자라면, 추가 수사가 필요하니 더 오래 감옥에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슈미레프는 브라질을 떠난 뒤에도 브라질의 친구들과 여자 친구에게 문자로 연락했으나 2023년 1월부터 연락이 끊겼다.
그가 귀국하지 않자 브라질 경찰이 압수 수색에 나섰다. 각종 개인정보가 담긴 전자기기 속에는 러시아 정보요원으로 그리스에서 활동하는 아내와 주고받은 문자도 저장돼 있었다. 금고에도 1만2000 달러의 현금이 남아 있었다. 모두 귀국할 계획이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다.
그가 사라졌을 무렵 러시아인 아내도 갑자기 그리스에서 사라졌고 그리스 당국이 그가 스파이임을 공개했다.
슈미레프는 출국한 뒤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울먹울먹하면서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들릴 텐데, 하나 알아둬. 난 그렇게 나쁜 짓 한 건 없어. 누굴 죽인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은 안 했어”라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yjkang1@newsis.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